남편에겐 대박이 아내에겐 피박이라면....
아내를 이렇게 사랑하라
아내여, 오래 살고 싶거든……
[yeowonnews.com=김재원] 젊어서는 시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젊어서는 시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덕도 체면도 사회적인 규범도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의 눈에 시간 같은 것이 보일 리가 없다.
시간의 가치야 말로 나이 들수록 민감해지는 것으로서, 시간의 가치를 알기 시작할 때 인간은 이미 자기 시간의 가장 소중한 부분으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자의 시간은 더욱 그렇다.
여자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을 동안만 젊다. 그녀가 이윽고 시간을 의식하고, ‘아까운 세월!’ 하고 탄식할 때, 사실 그녀가 아까워 하는 시간은 이미 그녀에게서 떠나가 버린 뒤다.
시간은 그래서 하나의 상실이다.
멈춰 있는 시간을 구경한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도, 시간은 한번도 제 자리에 있어 본 일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그 결론은 시간은 흐르게 되어 있는 것이고, 그것이 흐르는 동안 우리에겐 시간의 상실이라고 하는 가장 소중한 것의 상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테네시 월리엄즈는 말하고 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 그리고 독자들이 지금 내가 쓴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시시각각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시계가 때를 알리는 소리는 ‘상실, 상실, 상실’하고 끊임없이 상실을 알리는 소리로 들린다.
그렇다면 이것은 얼마나 허망한 여로(旅路)인가? 출발에서부터 어느 소멸점(消滅點)까지의 스케줄이 온통 상실로 가득 찬 인생이라고 하는 여로의 허망함에도 그 허망함을 시계소리처럼 정확하게 의식하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은 역시 우리가 시간에 걸고 있는 신뢰감 때문이다.
인간이 시간에 걸고 있는 신뢰감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이 지닌 절대성에 기인한다. 우리가 사는 인생에는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날 성싶지 않은 일들이 오로지 시간에 의해서만 해결되고 정리되지 않는가?
머리로 벽을 들이받고 죽고 싶을 만큼 사랑의 아픔은 견디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은 그 아픔을 어렵지 않게 치료해 주고 있지 않은가?
시간이 고치지 못할 병(病)은 없다고 말한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시간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가장 큰 선물인 저 망각이라고 하는 기능은 얼마나 고마운 은총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도 잊어버리게 한다.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미워하던 사람에 대한 감정도 시간이 흐르면 얼음이 녹듯이 형체도 없어진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모든 것들을 적당한 간격을 두고 정리해 주는 시간은 가장 성능이 우수한 정신적인 세제(洗劑)는 아닌가.
모든 것이 시간에 의해서 결정이 난다. 삶도 죽음도 오직 시간의 조화일 뿐이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시간을 의식하며, 시간을 시간답게 쓰고 있는가?
‘인간 칠십 고래희’라고 말하던 시절에는 오래 산다는 것이 큰 꿈이었다. 지금은 오래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잘살고 싶다는 사람은 많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사는 삶에서 공간적으로 살려는 것으로 인생관이 변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오래 살고 싶거든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라는 벤자민 플랭클린의 충고는 삶을 완전히 시간의 치수에 맞춘 감이 없지 않다.
한가한 사람을 위하여 시간은 절대로 봉사하지 않는다. 바쁜 사람을 위하여 시간은 절대로 꾀를 부리지 않는다.
아무리 살아도 후회가 많다고 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절대로 변명하지 않는다. 시간은 그를 위하여 할 만큼은 했으니까. 그런가 하면 지금 죽어도 후회는 없다는 사람에게 시간은 절대로 추궁하지 않는다. 시간은 그를 위하여 이제 할 것이 없으니까.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시간을 좀 더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시간은 섭섭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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