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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사원 구자관 칼럼

열네살에 시작한 내 첫사업의 아이템은..<구자관 칼럼 3>

육체적 굶주림은 참을 수 있지만, ‘배움의 굶주림’은 영원한 배고픔을 자초한다는 의식이 어린 가슴을....

운영자 | 기사입력 2021/06/23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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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임사원 구자관의 연재 칼럼 3/눈물  

열네살에 시작한 내 첫사업의 아이템은..

부모가  내게 물려주신 그 엄청난 재산 덕분에 

 

▲ 학교를 다니지 못한 ‘배움의 굶주림’은, 영원한 배고픔을 자초한다는 의식이...그래서 지금도 공부하는 자세..손에서 책이 떠나는 날이 없어서....     © 운영자


 

가난한 나라, 가난한 집..자연스런 눈물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사람, 가난한 나라에서도 가난한 집에서 살다 보면 눈물이 많아진다. 가난하다고 다 눈물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가난하지 않은 사람에게선 별로 볼 수 없는 눈물을, 가난한 사람에게선 흔하게 본다는 사실은, 가난에 대한 사실 확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눈물 많은 민족이다 하면, 우선 가난한 민족을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기 보단, 자연스럽다. 전쟁을 겪은 나라는 물론 가난한 나라이기 쉽고, 그런 나라에 태어난 사람에게서 눈물은 자연스러운 추출물이기도 하다.

 

내가 태어난 집은 그 시대로선 부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증조부님이 강원도 삼척에서 원님(현감)으로 계셨다. 그 시대 원님이라면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다 쥐고 있었으니, 말하자면 아무 아쉬움이 없는 권력자로, 아무 부러울 것도 없는 부유한 지배계급이었다.

 

증조부가 원님이었으니 조부때 역시 그 부()와 권세가 대물림되었다. 어렸을 때를 되돌아 보면, 집에 소가 끄는 마차가 있었고, 새끼 꼬는 기계도 생각 난다. 그런 흔치 않은 기계들이 있는 부자집이었고, 엄마가 일본식 모찌(참쌀떡)를 집에서 만들어 주실 정도였으니, 그 때까진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기억된다.

 

부유했다는 것이 물론 그 때 그 눈물 없던 시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가난과 눈물의 친밀관계는, 부유한 가정, 부유한 나라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배우고 겪으면서 자란 셈이다.

 

가난이나 눈물과 관계 없던 내 인생이 뒤집어진 것은 일곱 살 때. 6.25기 터졌고 여덟살이 되자마자 14후퇴를 맞아 피난민 대열에 섞였다. 그때부터 가난이 우리 집을 덥쳤다..국민학교 다닐 떼였는데, 그때부터 가난하기 시작했던가, 농지(農地)밖에 없었는데 양계장 하려고 농지 처분했다가 망했다고 한다.

 

▲     © 운영자

 

그래도 열네살에 시작한, 그래도 그것이 내 첫 번째 사업

당연히 가난이 시작되었고 집안은 풍지박산이 됐다. 아버지의 철물 공장, 고무공장도 실패했다. 풍지박산이 된 집안에 가난은 자연스럽게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때부터 서러웠다. 초등학교 시절은 거의 악몽이었다. 자식을 사랑으로 키운 것이 아니라, 가난으로 키운 부모 밑에서 서러움은 밤마다 치밀어 올라오곤 했다.

 

외가에서 살다가 서울로 옮겨왔다. 아이스케이키 장사를 시작했다. 아이스케이키 통을 메고 아이스케아키! 아이스케이키!” 외치며 다녔다. 날씨 덥고 좋은 날는 잘 팔리고, 덜 더우면 안 팔리는 아이스케익. 뿐만 아니라 메밀묵 장사, 찹쌀떡 장사..몸을 놀려 돈이 되는 장사라면 뭐든지 손을 대보기도 했다.

 

열네살때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슈샤인 보이... 슈사인 박스를 만들어 어깨에 메고, 손님 있는 곳을 찾아 다녀야 하는 사업이다. 힘 없으면 슈샤인도 함둘었다. 큰아이들에게 얻어터지기도 하면서...지금 생각하면, 참 죄 없이도 많이 맞던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토지와 자본과 사람이 있어야 사업이라는데, 세가지가 다 없었다. 나 하나밖에 없으니 사업이 될리가 없다. 혈혈단신. 토지라도 있으면 공장을 지을렌데 , 돈 없으니 토지는 당연히 사지도 못하고, 공장은 생각만 굴뚝 같앴지 짓지도 못했다. 좌판을 차려 놓고 장사를 하고 싶어도, 좌판 만들 널판지 살 돈이 없으니, 물건을 손에 들고 다니며 파는 행상은 겨우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것이 내가 처음 해 본 사업아이템이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놀고 먹지는 않았다. 하교 후 곧장 공장으로 가야 했다. 책가방 들고 공장에 다니면, 우선 그 공장에서 좋아할리 없다. 매일 다른 사람보다 일찍 새벽출근을 하는데도, 직공이 일감 놓아두고 공부하러 간다고 나가면 어느 공장 사장님이 좋아할까? 싫어하는 것이 딩연힌 일 아닌가? 눈치도 보이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공연히 책망을 받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눈물 흘리지 않았다. 가방 들고 공장 다니면서, 배고픔과 굶주림은 잠시이지만, 학교를 다니지 못한 배움의 굶주림은 영원한 배고픔을 자초한다는 의식이 그때부터 있었다. 배우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그래서 눈치가 보이는데도, 잠이 부족한데도 새벽 출근을 하고, 학교에 다니려 했던 것이다.

 

다행히 부모가 아주 큰 것을 내게 주셨다. 가난해서 재산을 내게 주시진 못했어도, 건강한 DNA를 주셨다. 그 덕분에, 그 눈물 많던 시절을 뛰어넘어, 지금 내가 여기 있다.

 

들것에 병든 엄마를 옮겨야 하는 날...참 많이 울었다

못을 만드는 일도 했다. 못을 만들기 위해 밤샘도 하고. 손으로 하는 수동 절단기로 철사를 잘라 못을 만들었다. 손으로 안되면 기계로 잘라야 한다 .어떤 때는 밤을 새워야 했다. 계속해서 며칠씩 새우기도 했다. 말 그대로 가내공업이었다.

 

야간 다니면서 하는, 행복할리 없는 일...밤새 못 자르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노레히면서 일 했다. 그 먼지 다 마셔가면서 해도 건강에는 이상이 없었다. 타고 난 DNA가 좋았거나, 어떤 경우에도 비관하지 않고 즐겁게 일 해서 건강한거 아니냐는 생각도 한다.

 

 

▲  사원들과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자주 가졌으면 좋은데......그래도 시간만 나면 사원 휴계실을 찾아가는 구자관 회장   © 운영자

 

 

이앙 할 일 즐겁게 하자. 건강하게 테어났으니 즐겁게 일하면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그 당시에 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대견하지만, 그걸 운명이라고 생각진 않았다. 또한 운명은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운명을 거부하는 방법은, 자기 자신에게 달린 것이라고 그때부터 믿어오고 있다

 

운명이라면 개척하고자 했다. 밤에 형이 야간학교를 다녀오면, 동생 데리고 조직도를 그리곤 했다. 이러이러한 회사를 만들겠다고...매일 그렇게 했다. 걸레 하나를 만들어도 필사를 해가며 기획했다, 매뉴얼을 일일이 기록했다.

 

지금 생각하면, 일 같지도 않은 일. 장난이라 하기에도 뭣한 그런 일을 하면서 매뉴얼은 무슨 매뉴얼, 하며 집어던지고 싶을, 그런 때는 진짜 없었다 . 필사하고, 그림으로 그려서 매뉴얼을 참 많이 만들었다. 지금 누가 그런 얘기를 들으면, 타고난 경영인이라는 소릴 할만큼, 그 때 만들어 놓은 것이 참 많다.

 

그만큼 기록을 중시헸다. 일에 필요하다 싶은 것은 모두 기록했다. 그런 내 소년시절의 기록이, 나중에 사업울 하게 됐을 때 놓치지 않고 기혹하는 능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일 할 때는 거의 눈물 없이 일 했다. 아니 눈물 흘릴 겨를어 없었다고 해야 옳다. 일 앞에 눈물은 얼씬도 못했다. 그러니 눈물이 좀 많이 흘렀겠나?

 

집안은 계속 가난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당연히 여기저기 빚 진 것이 있었다. 채권자들이 집에 들이닥치기도 했다. 50대 아버지를 찾아온 30대의 젊은 채권자가 아버지에게 폭언을 퍼붓고 할 때,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친구에게 돈 꾸고 못 갚으면 사채업자에게 채용해서 썼는데, 사업이 실패하자.사채업자가 집에까지 들이닥쳐 안방에 누워 버린 것이다. ..

 

집 안에는 장작 패는 도끼, 식칼도 있고...나는 참지를 못하고 도끼를 들어 그 인간에게 던졌다. 도끼가 날아가 대문에 꽝 부딪치자 채권자는 날쌔게 도망가 버렸다.

 

그가 도망 간 후, 어머니 아버지에게 혼이 났다. 그날 밤엔 참 많이 울었다. 물론 그 후에도 괴로운 일은 계속 연달아 일어났다. 채무로 인해 차압당한 집안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나마 그 집을 쫓겨나야 했다. 집을 빼앗기고 나가야 하는 날이 왔다. 엄마는 대퇴골 골절로 누워 계신데 엄마를 들것에 실어 옮겨 가야 했다. 그 날은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겪는 일은 얼마든지 울지 않고 참을 수 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를 들것에 실어 옮겨야 하는 날엔, 정말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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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dramon 21/06/26 [13:12] 수정 삭제  
  자서전의 머리글을 읽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배움의 굶주림은 영원한 배고픔을 자초한다"라는 글귀는 마음에 와닿고 여운이 남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TCSP 21/06/26 [16:27] 수정 삭제  
  가난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며 지금의 삼구를 만드신 구자관회장님, 존경합니다. 당신은 이땅에 진정한 기업가 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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